경제학자 하면 가장 유명하다 할 수 있는 애덤 스미스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1723년 6월 5일, 애덤 스미스가 세례를 받은 날 출생일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다. 이유는 출생일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국적은 영국이며 직업으로는 4가지로 정의할 수 있는데 윤리철학자, 경제학자, 신학자, 교수입니다. 그의 사상은 자유주의, 경제적 자유주의이며 종교는 어머니를 따라 개신교를 믿었습니다. 그의 대표 저서는 국부론, 도덕 감정론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애덤 스미스가 세례받기 전 6개월 정도 전에 사망하였으며, 4살쯤 어느 집시들에게 납치되었다가 삼촌 덕분에 구해져 어머니인 마거릿 스미스에게 돌아왔습니다.
14살에 대학교 글래스고에 입학해 허치슨으로부터 윤리 철학을 연구하였습니다. 이후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그 생활이 살아가는 데 있어 크게 작용하지 못하여 1746년에 자퇴하였습니다. 1748년 에든버러에서 강의하게 되었고, 그 강의의 평가가 좋아 1751년 대학교 글래스고의 논리학 강의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1759년, 유럽에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도덕 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발표하였습니다. 이후 2년 동안 프랑스, 그 부근을 여행하면서 여러 나라의 행정, 조직을 살펴보았고 중농주의 사상가와의 접선을 통해 그 사상가들의 이론과 사상을 배웠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글을 쓰는 데에 집중하여 1776년에 [국부론]을 발표하게 되었고, 그 책의 주장은 국가가 여러 경제적 활동에 관여하지 않는 자유로운 경쟁 상태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하여 사회 전반적인 질서가 유지되고 개발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책은 최초로 경제학을 체계적으로 쓴 책이며 그 후에 나온 많은 학설의 기초, 바탕이 된 고전입니다.
그는 1778년에 스코틀랜드의 관세 관련된 위원이 되고, 1787년에 글래스고의 학장으로 지냈습니다. 그는 역사적으로 영국의 정통파 '경제학 아버지'라고 불리며, 윤리철학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국부론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는 정부가 가계의 경제 활동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국부론을 출간할 당시에 각 개개인의 경제적 자유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처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개인의 경제생활을 저지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여겨졌고, 수출입 규제, 세금 등은 구체적인 이론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각 개개인이 본인의 이득을 추구하도록 두면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여 최종적으로 사회 전반적인 복지의 기능을 증가시키고 국가의 경제 개발이 많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국가의 기능을 아주 작게 축소해서 정부의 역할을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지위까지 낮춘 야경국가를 추구하였습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정부의 임무는 세 가지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1. 국가는 다른 나라의 위협과 폭력에서 사회구성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력을 유지해야 한다.
2. 국가는 사회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을 다른 구성원의 억압이나 불의에서 지키기 위해 사법제도를 많이 세워야 한다.
3. 국가는 사회 모두에게는 커다란 이득을 주지만 거기서 나오는 이득이 비용을 되돌려줄 수 없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도 지어서 유지할 수 없는 공공기구, 공공사업을 건설하고 유지해야 한다.
스미스는 사람의 더 많은 만족을 추구하는 성향, 그리고 교환하고자 하는 힘의 본성을 억압하기보다는, 본래 인간의 이기적인 면으로 본인이 원하는 것 대신 남이 원하는 것을 만들게 유도하는 시장을 통하여 본성을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개개인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부를 추구하는데 이득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의도가 없고 본인이 공공의 이득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모르면서 오직 본인의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았던 공공의 이득에 기여하게 된다는 주장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국제적인 경제 문제에서도 무역을 보호하는 것이 아닌 자유 무역을 주장하였고, 당시 각 국가의 정부가 본 국가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보호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수입을 저지하고 있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맞는 자유를 침범하는 일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당시 경제에 영향을 많이 미쳤던 중상주의에 대해서 비난을 특히 아끼지 않았는데, 중상주의자들이 얘기하듯이 국민의 자본은 화폐의 보유량, 금은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작업 능력에 비례하며 작업 능력을 높이기 위한 필수적 요소가 분업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저자로서 그 능력, 업적을 인정받아 대학교수가 되었고, 글래스고 대학교의 학장이 되면서 명예와 부를 누렸습니다. 스미스가 살아있을 때, 국부론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도덕 감정론]을 더 훌륭히 평하였습니다. 그는 무덤의 묘비를 애덤 스미스 [도덕 감정론]의 저자라고 적어주길 바라며, 그 정도로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스미스는 죽기 전 "미발표된 글은 모두 태워달라"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너무너무 부끄러운 글들이라 세상에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친구들은 할 수 없이 20권 분량이 넘는 글을 모두 불태웠고, 그걸 본 스미스는 마음 편히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죽은 후에 발표된 책이나 글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댓글